조성제(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무교(무속)인은 정월달이 가장 바쁜 달이다. 그 이유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 년 동안 단골들이 나쁜 액에서 벗어나 편안하기를 기원하는 ‘홍수막이’ 의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홍수막이는 어떻게 비롯되었으며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을까?
『태백일사/삼환관경본기』에 순(舜)임금 때 황하의 9년 홍수로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치수를 담당한 우사공(虞司空/禹임금)이 조선의 부루 태자에게 홍수를 다스리는 비법을 배우고자 왔다.
이때 부루 태자가 우사공에 이르기를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다. 그대의 왕(순 임금)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고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홍수를 막는 비결로 오행치수법을 기록한 ‘금간옥첩(金簡玉牒)’과 물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신침(神針)’과 물의 범람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皇鉅宗)’이 있으니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마침내 천부왕인(天府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부루 태자는 본래 오가 중에서 호가(虎加)의 우두머리였다. 호랑이가 그의 수호 동물이자 토템이었다. 그러다 임진 25년(BC 2309년)에 단군왕검이 남해로 순시를 떠났다가 그때 바다에 적룡(赤龍)이 출현한 것을 보고 대단히 상서로운 일이라 생각하여 부루 태자의 토템이자 수호 동물을 용으로 바꿔 용가(龍加)로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단군왕검은 용이 물을 다스리듯 부루 태자가 물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그를 ‘창수사자부루(蒼水使者扶婁)’로 불렀다. 여기서 창수사자의 ‘창(蒼)’과 부루의 ‘부(扶)’를 따서 창부(蒼扶)라는 말이 탄생하였다.
이렇게 용가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부루 태자는 홍수를 막는 등 물을 다스릴 수 있는 용왕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용왕으로 받들면서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사공에게 모든 액을 막을 수 있는 액막이 징표인 ‘천부왕인(天府王印)’을 주어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고, 우사공은 황하의 9년 홍수를 제압하고 훗날 왕이 되었다.
부루 태자의 천부왕인은 여러 가지 액을 막고 인간들을 복되게 하므로 그때부터 ‘홍수막이’란 말이 생겨났다. 지금도 정월 달이면 무당들이 단골들의 일 년의 액운을 막아 주는 것을 ‘홍수막이’라고 한다. 또 액을 막는다고 하여 홍액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갑자기 닥치는 나쁜 액이란 의미를 부여하여 ‘횡수막이’라 한 것은 당장 수정해야 한다.
현재 굿거리 중 창부거리는 바로 창수사자부루의 굿거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창부거리에서 반드시 열두 달 홍수(홍액)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창부란 말이 ‘창수사자부루’의 준말이지만, 시대의 변화와 일부 사람들의 왜곡으로 창수사자 부루의 준말인 창부(蒼扶)가 무당의 남편 아니면 광대의 의미인 창부(倡夫)로 변질된 것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무속(巫俗)이란 용어에는 ‘미개한 민족의 원시적인 사회적 습속’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무속에는 무교가 가지는 역사적인 정체성과 우리 민족의 심성을 나타낸 종교성, 그리고 사회성과 독창성을 완전히 무시한 용어다. 그러므로 용어를 모두 확실히 알고 근거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해석해야 무속이 아닌 무교가 되는 것이다.
한국 무교는 고대의 신화와 제천의식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해서 한국 문화사 속에 흘러온 종교현상이다. 또한 우리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며 잃어버린 상고사를 회복할 수 있는 작은 게놈(genome)이다. 얕은 지식으로 왜곡하고 수정하면 무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종교성을 무시하고 미신의 굴레에 가두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