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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역사칼럼] (3)입을 막을 수 없었다
  • 이창준 기자
  • 등록 2025-09-04 16:37:46
  • 수정 2025-09-04 16: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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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前 KBS 기자)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에 명시된 이 개념은 백성이 주인공인 민주주의 체제에다 모든 사람들이 고루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는 공화정의 개념이 합쳐진 것인데, 우리가 민주주의를 주로 미국으로부터 배워왔고 최초의 공화정은 로마에서 비롯되었다고 들었지만 공화정의 역사는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정치의 근간은 왕이든 황제든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와 그 군주를 떠받쳐주는 관리들이 피지배층인 백성들을 지배하는 형식이지만, 그것이 단순히 상하 수직적인 관계, 일방적으로 위에서 내려가는 관계가 아니라 백성들의 목소리가 위로 올라가서 신하나 왕과 소통되는 쌍방향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다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사례가 벌써 2천8백여 년 전에 있었다는 것이고, 신하들의 말은 백성들의 마음이란 명분을 깔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국 서주(西周, BC 1046∼771)의 10대 왕인 여왕(厲王, ?~BC 841)이다. 정치사를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이른바 '공화정(共和政)'의 시원이 된 사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의 공화정이 시작된 것은 B.C 509년 로마가 이탈리아 일대를 통일한 이후인데 비해, 중국의 공화정은 B.C 841년이므로 서양보다도 300년 이상 앞선다. 그리고 이 공화정의 발단은 왕을 떠받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제했던 데서 비롯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주나라는 봉건제도였다. 주나라는 전국의 땅을 제후들에게 분봉(分封)하여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고, 혈연에 근거한 종법(宗法) 제도로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 질서를 유지하였다. 주나라 왕실의 직할지를 ‘왕기(王畿)’라 하였고, 제후들에게 분봉한 땅을 ‘국(國)’이라고 하였다. 제후들은 경, 대부와 다시 봉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을 주나라 시대에는 국인이라고 불렀다. 

   

여왕은 아버지인 이왕(夷王)의 뒤를 이어 주나라 10대 천자(天子)가 되었는데, 이익을 탐하고 포악하고 사치스럽고 교만하였다. 여왕의 밑에 있던 국인(國人)들이 이에 대한 불평불만이 높아갔다. 그러자 왕은 위(衛) 나라의 무당을 불러서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고, 무당이 보고하면 그들을 죽였다.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사람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교환했으며, 제후(諸侯)들도 왕을 조회(朝會) 하러 오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갔으나 여왕은 오히려 “나를 비방하는 자를 없애버렸도다. 이제 감히 말하는 자가 없도다”라며 이제 세상이 조용해졌다고 좋아했다. 

   

주나라 왕실의 일족인 소목공(召穆公)은 여왕(厲王)에게 폭정(暴政)을 멈출 것을 간언(諫言)하였다.

   

“이는 백성의 언로를 틀어막는 것이옵니다. 백성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은 내(川)를 막는 것보다도 더 심한 일입니다. 내를 막았다가 무너지면 반드시 다치는 사람이 많은데, 백성의 입을 막는 경우도 또한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를 다스리는 사람은 물길을 잘 터주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그들의 말을 터주는 것입니다.” (是障之也。防民之口,甚於防川。川壅而潰,傷人必多,民亦如之。是故為川者決之使導,為民者宣之使言, 《國語》<周語上> 召公諫厲王止謗).

   

“백성에게 입이 있는 것은, 땅에 산천이 있어 모든 재화가 이 산천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또 땅에 고원, 낮고 웅덩이가 있는 습한 땅, 낮고 평평한 땅, 비옥한 땅이 있어 모든 의식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을 터놓으면 정사 가운데 좋고 나쁜 것이 가려질 것이고, 좋은 일을 행하고 나쁜 일을 방치하면 재화와 의식이 불어나게 될 것입니다. 백성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유행하는 것이니, 어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들의 입을 막아버린다면, 나라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民之有口,猶土之有山川也,財用於是乎出;猶其原隰之有衍沃也,衣食於是乎生。口之宣言也,善敗於是乎興。行善而備敗,其所以阜財用衣食者也。夫民慮之于心而宣之於口,成而行之,胡可壅也?若壅其口,其與能幾何?(≪國語≫ <周語上> 召公諫厲王止謗) ).

  중국 역사를 증언하는 만리장성.이렇게 간곡히 호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러자 나라에는 감히 정치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3년 뒤에 제후들과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여왕은 도읍인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장안)을 벗어나 체(彘, 지금의 산서성 곽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는 ‘국인폭동(國人暴動)’이라고 하거니와 이 쿠데타에 의해서 주나라는 최고지도자인 왕이 없어지고 B.C 828년까지 14년 동안 귀족 고관들에 의한 통치가 실시된다. 

   

이 사실은 중국에서 천자가 있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아니라 각 지역 제후들의 역사를 기록한 첫 번째 역사서인《국어國語》<주어 상 周語 上>에 기록돼 있다. 한편 사마천(司馬遷, BC 145? ~ BC 86?)도 같은 사건을 기록했는데, 여기서는 이 국인폭동 후에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천자를 대신해 함께 정무(政務)를 관리하였다고 하며 이를 ‘공화(共和)’라고 표현했다. 이를테면 서양의 로마에 300년 앞선 시기에 이미 공화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고는 14년 후에 쫓겨난 여왕이 죽자 공화정을 이끌던 소목공이 다음 왕인 선왕(宣王)을 옹립해 왕정이 돌아오게 됨으로써 공화정은 14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사마천이 <사기史記>에 쓴 공화의 원래의 의미는 군주가 없을 때 공경재상(公卿宰相)이 서로 화합하여 행하는 정치다. 근대에 들어서는 전근대적 군주제에 반하여 복수의 주권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의미한다. 현대의 공화정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민을 위한 국정을 집행함을 뜻하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조금 다르다. 그러나 왕이건 누구건 지도자 혼자서 독단으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동양 역사에서 최초의 반정(反正), 즉 쿠데타의 원인이 나라 사람들의 입을 막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서 잘잘못을 말하는 것을 위력으로 막다가 나라를 잃고 자신도 쫓겨난 것인데, 이처럼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억지로 막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이미 2천8백여 년 전에 경험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역대 지도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잊고 초기에는 자신의 개혁 의지, 나중에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정치를 하다가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 모든 해답이 있는데도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이 잘 인용하는 것이 국민은 물이고 왕이나 황제는 배라는 비유에서 나온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亦可覆舟)란 말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즐겨 이 말을 사용하고 어느 정치인은 신년휘호에 이 구절을 쓰기도 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다는 말로서 원래는 공자가 한 말(“孔子曰 夫君者舟也,人者水也。水可載舟,亦可覆舟。君以此思危,則可知也。”,《後漢書·皇甫規傳》注引《孔子家語》)이라고 전해지는데 후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다. 당(唐) 나라 때 간언을 잘한 육지(陸贄, 754~805)는 이 말을 풀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배는 곧 왕의 길(君道)이고 물은 곧 인심입니다. 배가 물길을 따르면 뜨고 거스르면 가라앉습니다. 주군이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굳건해지고 잃으면 위태로워집니다. 이 때문에 옛날에 훌륭한 임금(聖王)은 사람들의 위에 있을 때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좇으려고 하였고 감히 천하 사람들을 가지고서 그의 욕심을 좇도록 하지 않았습니다.”(“舟即君道,水即人情。舟順水之道乃浮,違則沒;君得人之情乃固,失則危。是以古先聖王之居人上也,必以其欲從天下之心,而不敢以天下之人從其欲。”,《奉天論延訪朝臣表》)

  주 나라 후기 수도가 있던 낙양.

이러한 것들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모든 동양의 역사에서 지도자는 황제든 왕이든 상관없이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가장 평범하고도 확고한 진리의 구체적인 사례 모음집이다.


동양사 최초의 쿠데타, 주나라의 ‘국인폭동’은 언로 봉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소목공의 간언을 무시하고 억압과 폭정을 행한 결과 주나라 최고지도자인 ‘여왕’이 멸망한 점, 이런 것들은 로마보다 300년 앞서 중국에서 인류 최초의 공화정이 발단했다는 사실을 넘어, 민주공화정의 기본이 국민들을 위하는 데 있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 진리는 2천백 년이 지난 1776년 7월 4일에 마침내 인류의 위대한 선언문으로 등장했다. 미국 독립선언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민주공화정을 앞세운 현대의 정치 역사에서 여러 차례 그러한 진리를 눈으로 확인해왔다.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어 압도적인 의회의 힘을 믿고 제도의 힘을 우선하는 것은 국민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방향이나 권력을 몰아가려는 시도는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대립이 아닌, 어느 특정 세력만을 위한 전횡.... 이런 것들은 국민들이 바라는 올바른 정치가 아니다. 젊은 인재를 찾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중대한 시기, 역사의 곳간에 들어가서 그 사례들을 찾아서 이 시대, 앞으로 오는 시대를 비출 지혜의 양식, 지혜의 빛으로 삼는 일을 무시하고 한 쪽의 뜻대로 모든 가치와 힘을 독점하려 하는 것은 민주공화정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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