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2025년 4분기 잠정 실적 발표
삼성전자가 연결 기준으로 매출 93조원, 영업이익 20조원의 2025년 4분기 잠정 실적을 발표했다. 4분기 실적의 경우 전기 대비 매출은 8.06%, 영업이익은 64.34% 증가했고,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2.71%, 영업이익은 208.17% 증가했다. 잠정 실적은 한국채택 국제회계기준(IFRS)에 의거해 추정한 결과이며, 아직 결산이 종료되지 않은 가운데 투자자들의 편의를 돕는 차원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2009년 7월부터 국내 기업 최초로 분기 실적 예상치를 제공하고, 2010년 IFRS를 선적용함으로
이동식(전 KBS기자)역사서를 읽다 보면 치란(治亂)이란 말이 나오고 일치일란(一治一亂)이란 말도 나온다. 治는 ‘다스릴 치’이니까 잘 다스려진 때를 말하고, 亂은 ‘어지러울 난’이니까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천하가 혼란스러운 때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일치일란이란 말은 한 번 잘 다스려지면 다른 때에는 잘 다스려지지 않음이 있다는 뜻을 담은 사자성어라고 하겠다.
당 태종 때 ‘정관의 치’는 정치가 잘 된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당 현종 때 ‘안록산의 난’(755년에서 763년에 이르기까지 약 9년 동안 당나라를 뒤흔든 난으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주동이 되었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정치를 간신들에게 맡긴 사이에 나라가 엉망이 된 틈을 타서 반란이 일어났다)은 정치가 잘못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안록산의 난’은 그 자체로 세상을 어지럽힌 것이지만 이런 난리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선행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것은 현종 후반기인 개원(開元, 당 현종 때의 연호) 24년(736)에 장구령(張九齡)을 파면시키고 이임보(李林甫)를 재상으로 삼은 데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많다. 바로 이 점에서 역사를 읽을 때에는 정치가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분기점, 곧 기미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말 없는 청산(靑山)이요 태(態) 없는 유수(流水)로다
값없는 청풍(靑風)이요, 임자 없는 명월(明月)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 없이 늙으리라"
우리가 잘 아는 이 시조의 작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성혼(成渾, 1535~1598)이다.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함께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성혼이 살던 곳은 파주 우계리(牛溪里)라서 우계라는 호를 갖게 되었는데, 같은 파주군의 율곡리에 살면서 율곡이라는 호를 갖고 있던 이이보다는 한 살이 더 많아, 나이 스물에 두 뛰어난 젊은이는 서로가 일생의 벗이 되기를 맹세하고 평생 노선을 같이 했다.
그러나 율곡이 현실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다가 말년에 당쟁에 몰렸다면 우계는 퇴계처럼 나라에서 주는 벼슬을 계속 사양하고 학문과 제자양성에 정진해서 당대에 높은 이름을 얻었다.
우계 성혼 상상화(우계 기념관 소장)
그런 성혼이기에 당시 새로 즉위한 선조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선조는 즉위 초부터 퇴계를 비롯한 당시의 이름 있는 현사들에게 정치를 잘 하기 위한 자문을 자주 요청했는데, 성혼은 선조 14년인 서기 1581년 3월 내섬시(內贍寺, 오늘날의 조달청) 첨정(僉正, 종4품)에 임명 되고 왕으로부터 자문을 요청 받는다. 선조는 제일 먼저 대도(大道)의 요점, 치란의 원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현시대에 급히 이룰 일, 생민(生民)의 고통에 대해서도 하문했으며, 끝으로 마음을 비우고 선한 말을 따르겠으니 임금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성혼은 장문의 글을 올린다.
"신은 생각건대, 고금 이래로 일치일란(一治一亂)이 오랫동안 반복돼 왔는데, 그러한 차이는 천하의 동태와 흐름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나누어지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임금의 한 마음이 밝으냐 어두우냐에 따라서 인재를 기용함에 사(邪, 잘못)와 정(正, 잘됨)이 있게 되고 인재 기용에 옳고 그름이 있음으로 인하여 천하의 안위가 판가름 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상 일이 잘 되고 안되고는 알기 쉽다고 하겠지만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며, 민정(民情)의 향배는 알 수 있으나 좋고 나쁘고를 파악하는 마음은 일정하지가 않아서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禹) 임금은 나랏일에 근면하여 스스로 편안한 여가를 누리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을 다스렸고, 반면 순(舜) 임금은 어진 이를 의심하지 않고 위임하며 간사스러운 소인을 미련 없이 제거하는 식으로 인물을 썼습니다. 하, 은, 주 등 삼대의 융성한 시절에는 임금이 왕도를 세우고 현명한 임금과 충량한 신하가 서로 만나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상하가 서로 통하여 태평을 이루었으니, 제대로 된 정치의 훌륭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중세로 내려와서도 시대마다 인재가 있었는데 결국 임금의 역량의 대소가 인재를 얻어 잘되고 못 되는 관건이 되었습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제27권 선조조 4 )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찾아내 쓰는 일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 성혼은 역사 속에서 그런 사례를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인재를 잘 쓴 사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소하(蕭何, ?~BC 193).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의 기틀을 다진 그는 한신(韓信) ·장량(張良) ·조참(曹參)과 함께 고조의 개국공신이지만 한신이 난을 일으킨 데 비해 소하는 끝까지 유방을 도와 한신의 반란을 평정하고 신하로서 가장 높은 상국(相國)(상국은 일반 관리들이 최고로 오를 수 있는 승상의 위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신하로서의 최고의 관직으로서 주로 개국공신이나 황제를 옹립한 신하에게 이 작위를 수여한다. 전한 때 고조 유방이 자신의 개국공신인 승상 소하에게 이 직위를 신설, 승진시켰고, 이후 대장군 조참에게도 제수하였다. 그 이후 360년 동안 폐지되었다가 후한 말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여 스스로 상국이 되어 이 직위를 부활시켰다)에 제수됐다. 재상 시절에는 진나라의 법률을 취사선택하여《구장률(九章律)》 을 편찬함으로써 한나라를 다스리는 법률의 기초를 마련했다.
조참(曹參, ?~BC 190)은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그를 따라 한신(韓信)과 더불어 주로 군사면에서 활약하였는데 몸에 70여 군데의 상처가 있으면서도 진군을 공략하여 한(漢)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평양후(平陽侯)로 책봉되고, 그 후 경포(黥布)의 반란 등을 평정하였다. 고조가 살아있을 때에는 소하가 더 인정을 받았으나 고조가 죽은 뒤에는 공을 다투던 소하(肅何)가 오히려 그를 추천해 상국(相國)을 맡도록 해서, 다음 황제인 혜제(惠帝)를 잘 보필하였다. 이들 두 명 신하로 해서 당시 한나라에서는 “소하는 정연한 법령을 만들고, 조참은 그를 이어받아 준수하며 청정한 정치를 하였다”는 노래가 널리 불렸을 정도라고 하니, 그 두 사람이야말로 인재발탁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BC 6 ~ AD 57)때의 명신인 등우(鄧禹, AD 2~ 58) 역시 그러하다.
광무제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중간에 외척인 왕망에 의해 신(新)이라는 나라로 바뀐 상황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즉위해 후한을 연 황제로서 중앙집권화를 꾀했고 학문을 장려하고, 유교존중주의를 택해 예교주의의 기초를 다진 지도자이다.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 하북으로 순행 갔을 때 죄수들을 풀어주고 학정을 폐지하였으며, 군대의 규율을 엄하게 하여 추호도 범법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노비를 석방할 것과 노비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금지하라는 칙령을 여러 차례 반포하였다. 빈민들이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것을 줄이기 위하여 항상 구제미를 발급하고 조세와 요역을 경감시켰으며, 수리시설을 건설하여 농업생산을 발전시켰다. 진상품을 받지 않았고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등의 조치는 모두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광무제가 전쟁터에서 처음 등우를 만났을 때, “님의 위덕(威德)이 사해에 전해지는데 제가 촌척(寸尺, 한 자 한 치라는 뜻)의 도움을 드려서 공명을 역사에 남기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하였고 이에 광무제는 그를 참모로 삼았다. 악양(樂陽)을 탈취했을 때, 등우는 이렇게 간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은 온 천하가 혼란스러워 백성들은 명군을 생각하기를 갓난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나라의 흥함은 지도자의 덕이 얇은가 두터운가에 달려있지 그 땅이 얼마나 큰가 작은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등우는 유수보다 여덟 살이나 어렸으나 훌륭한 군 지휘관이었으며 특히 인물을 꿰뚫어 보는 힘이 탁월하여 유수로 하여금 수많은 인재를 얻게 했고 후한의 창시자로서 성공하도록 보필했다.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 가의(賈誼 BC 200~ 168).
가의는 하남성 낙양 출신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문제의 총애를 받아 약관으로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 ·관제 ·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가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다. 그러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이를 애도한 나머지 1년 후 33세로 죽었다. 저서에《신서(新書)》10권이 있으며, 진(秦)의 멸망 원인을 추구한 <과진론(過秦論)>은 널리 알려져 있다. 좌천되었을 당시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 BC 343 ?~BC 278 ?,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어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또 다른 사례로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주역이었던 유비(劉備)를 도운 촉한(蜀漢)의 재상 제갈량(諸葛亮 181-234). 앞서 말한 당나라 태종 때의 방현령(房玄齡)과 위징(魏徵)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당나라 현종(玄宗)을 도운 요숭(姚崇, 650 ~ 721)이 있다. 그의 본명은 원숭(元崇)이지만 현종의 연호가 개원(開元)이므로 피휘(避諱), 곧 황제나 왕이 쓰는 이름자를 피해서 성을 원(元)에서 요(姚)로 바꾸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이래 중종(中宗) ·예종(睿宗)과 현종 초기에 걸쳐 여러 번 재상의 직에 올라 국정을 숙정하고 민생의 안정에 힘을 썼으며, 716년에 은퇴하였다. 송경(宋璟)과 함께 개원의 명재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이로써 당시 현종의 치세를 개원(開元)의 치(治)라고 하는데, 이 치세의 기반을 제공한 사람이다. 요숭을 아는데 가장 쉬운 말이 ‘반식재상(伴食宰相,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을 빗대어 이르는 말)’이라는 말이다. 요숭과 함께 재상에 있던 노회신은 청렴하고 검소한 사람이었지만 요숭이 10여 일 간의 휴가를 갔을 때 혼자서 정무를 보았는데, 요숭처럼 신속히 처리하지 못해 정무가 크게 지체되었다. 노회신은 자신의 능력이 요숭보다 크게 뒤떨어지는 것을 알고, 그 후부터는 모든 일에 요숭을 앞세우고 요숭과 상의해 처리해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반식재상 이라고 불렀고 이 말은 뒤에 능력도 없이 월급만 축내는 고위관리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혼은 여기에 덧붙여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재위 357∼385)의 재상인 왕맹(王猛 325~375)을 소개하면서 의미 있는 말을 한다. 곧 이들 지도자와 재상들은 서로 믿고서 의심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미천한 가문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경서와 병서 등 공부를 많이 한 왕맹은 자신의 뜻을 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32살이 된 357년 부견이 스스로 대진천왕(大秦天王)에 올라 인재를 구했고, 신하의 천거로 왕맹을 만났다. 왕맹과 부견은 이야기를 나누자 서로 뜻이 맞았고, 부견은 그를 삼국 시대 제갈량에 비견했다. 부견의 정책과 전략의 대부분은 왕맹에게서 나왔다. 왕맹은 문벌과 귀족을 억누르고, 내정을 정비하고 법제를 정비했다. 현인을 발탁하여 중상(重商)보다는 중농(重農)정책을 추진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전진의 중국 왕조화를 진행하였다. 또한 수도 장안으로부터 각지에 이르는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 양쪽에 수목을 심는 것을 시행하여 전진의 치안을 다른 어느 곳보다 좋게 하였다. 왕맹의 정책으로 전진의 국력은 강대해졌고, 이로 인해 전진은 오호십육국 시대 국가 중 가장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도 했다. 375년 7월 왕맹은 병으로 인해 죽었다. 죽기 직전 왕맹은 마지막 충성심을 담아 부견에게 경고했다. 동진을 정벌해 중국의 통일을 노리던 부견에게 정복전쟁을 반대하고 내치에 전념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그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킨 부견은 비수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그것은 당 태종이 위징의 말을 듣지 않고 고구려 정복전쟁을 감행하다 망한 것과 같은 사례이다. 성혼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진의 부견이 왕맹에 대해서, 그리고 우문태(宇文泰)가 소작(蘇綽)에 대해서도 서로 뜻이 맞아 의심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넉넉히 국가를 건립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한때의 영웅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 무종(唐 武宗)과 주 세종(周 世宗)도 모두 영걸스러운 임금이었는데, 이들도 이덕유(李德裕)와 왕박(王朴) 같은 사람을 얻어 의심 없이 위임시킨 뒤에야 계책을 결정하고 승리를 제압하여 그 뜻을 이룰 수 있었으니, 이들도 세상에 보기 드문 만남이었습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제27권 선조조 4)
그런데 그 말을 잘 들여다보면 유능한 인재를 발탁한 후에는 이를 믿고 맡겼다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서 송나라 역사서에는 “사람이 의심되거든 쓰지 말고,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성공한 왕은 일단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돼 발탁하면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혼은 임금에게 현명한 인재를 잘 골라 써야 한다고 충언한다. 재미있는 것은 난세에 소인을 알아보는 것보다도 치세에 간신을 알아보기가 더 어렵다는 지적이다. 치세(治世, 잘 다스려져 화평한 세상)의 소인들은 재간만 뛰어나서 그 죄악이 드러나지 않는데, 예전에 보면 "당시 임금들이 그를 좋아하고 속된 선비들이 추종하게 되는데, 이들은 은미하게 임금의 마음을 잘 맞추어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되고 자신의 간사스러운 뜻을 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에게는 국가의 일보다는 자기세력 키우기에 힘쓰게 되는데, 임금이 바른 마음을 지닌다면 능히 구분해 낼 수 있다고 충고하면서 글 말미에 가서는 임금의 현재의 인재 선택이 잘못됐다고 매섭게 지적한다.
"지금 전하께서 발탁하시는 자들은 매번 사람들의 기대 밖의 인물들이었으니 인심을 무슨 수로 열복시키겠으며 여러 가지 치적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뜻은 반드시 '선비들은 특이한 것을 좋아하여 과격스럽고 오활한(오활(迂闊)하다, 곧바르지 아니하고 에돌아서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병통이 있으니 그들을 쓰면 필시 안정시키지 못할 것이다. 속류들은 지난 일들만을 따라 하여 부리기가 쉬우므로 절로 일을 이루어나갈 수가 있고 과격스러운 병폐도 없으니 이들을 쓰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치를 하자면 올바른 인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신 것인데, 인재를 얻지 못하고서도 잘 다스려질 리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속류들은 본디 고상한 뜻이 없고 오직 관직만을 아끼므로 그들에게 정치를 맡기면 단지 문서를 다루고 옛 일을 들먹이면서 자기의 벼슬자리를 잃지 않으려고만 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인사 전형을 맡기면 사정(私情)을 앞세우고 공의(公義)를 뒷전으로 하여 인재를 뽑는 것이 자기들의 임무라는 것을 모르고, 법조나 역사적인 사례, 문서(禮文, 예문)을 강론하게 하면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고 캄캄하여 의리의 소재를 알지 못하며, 옥사나 송사를 주관하도록 하면 오직 청탁에만 따르고 관청의 병폐를 논의하라고 하면 그저 예전의 규례만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 점을 살피지 않고 관직이 높은 사람은 덕이 후하다고 하시고 공손하고 과묵한 사람에게는 화평스럽다고 하시면서, 이들을 우대하고 포상까지 하십니다. 이리하여 풀잎을 휩쓰는 바람의 형세로 몰아침에 따라 이런 것을 본받는 풍습이 생겼고 그에 반해 선비들의 기풍(士氣)은 날로 저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말류의 폐단이 임금을 돌보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도 고려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 (《국조보감(國朝寶鑑)》제27권 선조조 4)
성혼은 이같이 왕이 국사가 잘못되는 본질을 보지 않고 표피만을 보면서 국사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근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그런 사태를 밖에서는 다 아는데 안에서만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어느 시대 어느 왕이건 즉위 초에는 좋은 인재를 뽑아 국사를 맡김으로써 성공한 왕이 되고 싶지 않은 왕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당시의 학자들이 이런 왕도정치의 본질을 가르쳐왔던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인재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왕의 한계를 알아차린 총신들은 자신의 세력을 심느라 주위의 원성을 사고, 그것이 국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갔음을, 우리는 성혼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주 보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성혼의 말이 돋보이는 것은, 임금의 잘못에 대해서 목숨을 내걸고 강력하게 개선을 요청하는 그 당당함이다.
우리는 조선왕조 500년을 성공한 역사라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왕이 신하에 대해서 바른 가르침을 언제나 요구해 왔고 어진 신하들은 왕의 잘못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지적을 해 온 그 전통만은 우리가 평가를 해주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전통으로 해서 조선왕조는 나름대로 기강을 세우고 500년을 이어져 온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 인재를 잘 고르고 일단 고른 다음에는 철저히 믿어주어 마음껏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성혼의 지적은, 당시의 왕인 선조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결코 아니다.
현대로 들어와서 역대 대통령들이 자신의 정치를 일선에서 지휘해 줄 총리를 뽑고 장관을 뽑으면서 반 년이 멀다 하고 교체하고 하던 것을 볼 때, 물러가는 사람들이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대통령으로서는 인재의 발굴이나 선택이 그만큼 어렵다고 하겠지만 그만큼 대통령도 인재를 믿지 못하고 자주 교체함으로써 그가 책임 있는 시책을 펴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많이 초래되었다.
물론 과거 왕조시대처럼 조용한 시대가 아니고 변화가 많고 각계의 목소리 또한 커서 예전같이 오래 사람을 쓰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발탁된 인재는 믿고 써야, 그 인재가 인재로서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혼 선생이 올린 인재론은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