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금기를 넘어서는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1960년대 등장한 경구 피임약은 여성에게 선택권을 주었지만, 동시에 종교와 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8년 첫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을 때도 “인간의 탄생을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논란이 뜨거웠다.
이후 태아 기형을 진단하고 낙태로 이어지는 의료 기술은 생명 존엄과 부모의 선택권을 놓고 사회를 양분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이들 기술은 제도와 규제 속에서 어느새 일상으로 들어왔다.
오늘날 논쟁의 중심에는 유전자 편집이 있다. CRISPR-Cas9 같은 기술은 인간의 유전자 배열을 가위로 자르듯 교정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난치병 치료와 유전병 예방의 희망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생명의 설계자로 나서는 오만한 행위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다.
유전자 편집의 장점은 분명하다. 부모로부터 유전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 질환을 미리 교정한다면, 고통 속에 태어날 아이를 구할 수 있다. 환자의 유전적 특성에 맞춘 맞춤형 치료는 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나아가 인간의 수명과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자 또한 깊다. 과연 어디까지가 질병 치료이고, 어디서부터가 욕망의 개입일까? 외모나 지능, 체력까지 인위적으로 강화된 ‘디자이너 베이비’가 등장한다면, 사회는 새로운 불평등과 차별을 낳을 것이다. 또한 편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변이는 후손에게까지 이어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남길 수 있다.
이처럼 유전자 편집은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와 사회적 합의의 문제로 다가온다. 한 국가의 법이나 제도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국제 사회의 공동 기준과 규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만들어진 존재’로만 보지 않고,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균형을 잃지 않는 일이다.
결국 유전자 편집은 피임약과 시험관 아기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걸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인다. 처음에는 거센 반발과 두려움 속에서 출발하겠지만, 언젠가는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또 사회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인간관을 가지고 이 기술을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생명의 비밀을 열어젖히는 문 앞에서, 과학은 이미 손잡이를 돌리고 있다. 그 문을 열어젖힐지, 닫아둘지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윤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