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역사박물관, 초대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전시
  • 이창준 기자
  • 등록 2025-08-09 13:14:44
  • 수정 2025-08-09 16:21:34
기사수정
  • 광복 80주년 기념 서울·안동 교류 특별전...8월31일 까지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최병구)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전시를 8월 5일부터 31일까지 개최한다. 


광복 80주년 기념 서울·안동 교류 특별전으로 마련되는 이번 전시는 안동의 명문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일가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고택 임청각 복원 개장(2025.8.15.)을 소개한다.


전시는 이상룡 선생의 일생에 걸친 독립운동의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의병운동에 진력하다가 혁신유림(革新儒林)으로서 활동하던 초기부터, 54세의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서 경학사(耕學社), 서로군정서 등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며 활동하던 중년시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말년 시기까지와 일가 가족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석주유고(石洲遺稿)> 내용을 주제로 한 서예작품 전시 등으로 구성됐다.


1925년 10월 21일 독립신문에 게재된 국무령 이상룡 취임사와 취임식 기사 전시물.(사진=반창꼬뉴스)


이상룡(1858-1932) 선생은 고성이씨(固城李氏) 법흥 종중의 안동 임청각(臨淸閣)출신으로, 을미사변 당시 항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근대사상을 수용한 혁신유림이 되어 근대적 정치조직이라 할 수 있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하자, 선생은 54세가 되던 1911년 문중의 가산을 정리하여 가족을 비롯한 일가 50여 가구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 도착한 후 애국 지사들과 함께 무장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열었다. 1912년에는 경학사를 계승한 부민단을 만들었고, 부족한 독립자금의 충당을 위해 1913년에는 종택인 임청각을 매도했다. 부민단을 중심으로 남만주 13개 단체를 통합한 한족회를 발족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는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를 조직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하였다. 교육기관인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의 후신)를 통해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북로군정서 등에 지원하여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1925년 9월에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돼 독립운동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이상룡 선생의 열렬한 애국심은 함께 망명하였던 아들 이준형(李濬衡), 손자 이병화(李炳華)를 비롯한 일가 친척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모두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이상룡의 문집인 <석주유고>에 수록된 시문 중 간도 망명생활의 소회와 함께 독립에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시문과 취지서 등 50여 편을 고성이씨 법흥 종중의 일가 후손인 원로 서예가 유천(攸川) 이동익(李東益)의 필치로 쓴 서예작품으로 전시했다. 


목숨을 건 간도 망명생활 속에 읊은 시에는 굽히지 않는 독립의 의지가 담겨 있고, 100여 년전 국민주권의 공화정을 꿈꿨던 이상룡의 정치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대한협회안동지회와 경학사의 설립 취지서는 그의 애국정신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8일 오후 4시께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다.(사진=반창꼬뉴스)

0
사이드 기본배너01-유니세프
사이드 기본배너02-국민신문고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