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하늘을 쳐다 보기는 하고 있긴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인생의 반환점을 훨씬 지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을 받던 시절은 지나가 버리고 사랑을 주던 분들은 모두가 떠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객지에서 돈 벌어서 호강을 시켜 드리겠다는 다짐은 간 곳 없고, 눈앞 자식들의 치다꺼리로 또 직장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경쟁으로 앞만 보고 질주한 세월은 배꽃이 내린 머리와 주름살을 훈장처럼 남긴 모습입니다.
거울 앞 누이의 고운 모습이 아니고 타인 같은 자화상에 웃어 보아도 찡그린 모습은 세파가 남긴 상처의 흔적 같습니다.
부모님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무한 사랑을 받았던 것을 손주에게 전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예고 없이 떠나는 동창과 고향 친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생을 관조하는 깊은 철학을 깨우친다고 하여도 노을과 함께하는 저녁연기도 예와 같게 보이질 않습니다.
받던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변했으며, 함께하는 사랑마저 마음탓인지 부부애는 모두가 시들하다고 푸념들입니다. 부부는 맹물 같으니 몰래하는 사랑이 흔하다고 하는데 사랑의 기준은 윤리만은 아니라고도 합니다.
필자는 지구를 다녀간 인간의 합이 일천억 명 정도라 하는데 그들 각자의 사랑과 시대마다 사랑의 총합을 생각해 봅니다. 임금과 머슴의 사랑이 차이가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300년 전 안동의 어느 무덤에서 아내는 먼저 간 남편에게 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여보! 다른 사람도 우리처럼 이렇게 좋을까요?'' 이 한 줄이 편지의 절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반 부부가 사랑의 희열이 너무나 좋아서 ''머슴도 이렇게 좋은 것을 느낄 수 있을까?''란 여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약한 양반에 비하여 머슴은 지게를 많이 지고 다녀서 단전호흡으로 성욕이 더 강하다고 항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질적인 차이야 있기 마련이겠지만 하늘이 부여한 감정의 절정은 인간이면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기능은 본능이기에 특별한 교육 없이도 저절로 잘 되니 다행입니다.
시방 어떠한 사랑에 머물고 있는지는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