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
오는 7월 17일은 대한민국의 최고 규범인 헌법이 제정된 지 7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를 기본 요소로 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채택하고 선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제헌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고, 이 헌법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우리 헌법은 9차 개정을 통해 현행 제6공화국 헌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현행 제6공화국 헌법 개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985년 12월, 김대중·김영삼 두 정치 지도자가 중심이 된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는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 운동’을 벌이기로 하면서 본격적인 개헌 운동에 나섰습니다.
이후 박종철, 이한열 두 청년의 숭고한 희생과 시민, 노동자, 학생들이 주축이 된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1987년 10월 29일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헌법이 공포되어 그 헌정 체제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제6공화국 헌법은 헌정 사상 첫 여야 합의로 태어난 것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으며, 그 헌정 체제가 38년간 이어져 오며 건국 이래 최장수 헌법이 되었습니다.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은 1971년 이후 16년 만에 다시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건국 후 9번째로 단행된 1987년 개헌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역시 대통령 선거 방식을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 선거’로 불리는 간선제에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 단임제’로 바꿨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1987년 군부독재를 물리친 6월 항쟁의 진정한 요구는 ‘대통령 단임제’가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였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세력이 번갈아 정권교체를 이루며 지난 6·3 대선까지 아홉 분의 대통령을 국민 손으로 직접 선출하면서 장기 집권의 위험성은 사라졌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대통령 단임제’를 고수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잘해도 한번, 못해도 한번’이라는 ‘대통령 단임제’는 오히려 독선적인 ‘제왕적 대통령’을 낳는 폐단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평가받을 수 없는 권력은 자의적이고 무책임하게 행사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선출된 지난 여덟 분의 전직 대통령 중에 말로(末路)가 탄핵 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불행한 모습들을 목격했습니다.
돌아보면 모두 ‘제왕적 대통령제’가 낳은 폐단이 원인이었고 저는 ‘대통령의 불행은 곧 나라의 불행’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틀이 필요합니다. 현행 대통령 중심제는 권한 집중으로 인한 부작용이 반복되고,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분권형 권력구조와 임기를 연임제나 중임제로 하는 개헌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격랑 속에서 치러진 지난 6·3 대통령 선거에서 각 후보가 공통으로 내건 공약이 “87년 체제를 넘어서겠다”라며 ‘4년 중임제 + 총리 추천제’ 또는 ‘국회 견제 개헌 필요’ 등 권력구조를 개편하자는 개헌을 공약했습니다.
1987년 단임제를 시행한 이후 38년이 지나는 동안 국제 정세와 국민 의식 수준은 대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38년 전에 가설(加設) 한 틀에 스스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과 사회는 성숙해졌고, 38년 전의 옷을 그대로 입기에는 너무 방만해져 있습니다. 이제 헌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가 된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도 “세상은 날로 변하는데 낡고 썩은 법을 그대로 둔다면 국가는 쇠망하고 사회는 타락하고 백성은 고통으로 신음한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제도적 장치도 변화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 연·중임제는 세계 보편적인 제도입니다. 대통령 연임제나 중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현재 세계에서 대통령 중심제 102개 국가 중 미국, 러시아 등 96개국이 채택하고 있습니다.
단임제 국가는 한국, 몽골, 필리핀, 파라과이, 페루, 콜롬비아, 멕시코, 볼리비아, 온두라스, 파나마 등, 하나같이 소위 정치 후진국들뿐입니다.
명실상부한 세계 경제 10위권의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나라도 이제는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을 막기 위해 ‘분권형 권력구조’로 하고, 임기를 연임제나 중임제로 하는 개헌을 서둘러야 합니다.
대통령 연임제나 중임제는 성공한 대통령을 가능하게 합니다. 대통령에게 최선의 정치를 유도하는 동기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중임제의 경우 ‘잘하면 중임, 못하면 교체’, 그러니 ‘이번에 잘해야 다음에 또 뽑아줄 것이다’라는 기대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연·중임제는 안정적 국정 운영을 가능하게 합니다. 국정이 5년짜리 단막극도 아닌 토막극처럼 이뤄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중장기 국책사업의 수립과 지속적 추진이 활성화됩니다.
한마디로,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여는 성공한 정권을 낳게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4년 중임제를 통해 국민의 평가를 받게 하고, 이전 정권에서 진행하던 사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재의 대통령 단임제는 임기를 1회로 제한함으로써 국정 최고 책임자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유임시킬 수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소지도 없지 않습니다.
늘 실패한 정권, 단절된 정권에 익숙해진 우리 국민에게 대통령 중임 또는 연임제 개헌은 선진 대한민국 발전을 위한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주권의 운용이 국민의 의사에 따라 삼권분립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대의제 국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국정에 대하여 의견이 맞설 때는 다양한 입장들을 조정하여 국민의 뜻을 존중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는 헌법정신과 다르게 양극단으로 분열된 지 오래되었고 여당과 야당은 협력과 합의보다는 대립과 반대의 정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기에 광적인 팬덤 정치를 기반으로 막말과 네거티브 공세가 판을 치며 정치는 관용과 존중, 타협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통합보다는 분열, 신뢰보다는 불신, 협력보다는 대립으로 가득 찬 우리 정치는 결국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들고 신성한 ‘헌법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저도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라볼 때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헌법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입니다.
뜻깊은 77주년의 제헌절을 맞이하여 ‘헌법의 가치’를 통해 온 국민이 단합하고 화합하여 국민 대통합을 이루고, 헌법에 명시된 곧은 길을 다 함께 걸어서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제헌 이후, 6·25전쟁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숱한 시련 속에서도 헌법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선열들의 희생 앞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한광옥(전 대통령 비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