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七宮)에 대한 글을 처음 쓴 때가 1997년이었다. 그 당시 신문기자로 퇴직한 어느 분이 이 글을 김대중 정권 때 청와대로 보내, 느닷없이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원론적인 답장을 받아 당황한 적이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다시 이글이 청와대로 전달되어 원론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퇴임 전 2006년 10월 23일 정오에 처음으로 칠궁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알았다. 필자가 제안한 것을 노무현 정권 때 청와대에서 받아들였으며, 그 후 매년 10월 넷째 주 월요일 정오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진행하였다.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에서 칠궁제를 지낸다는 소식이나 기록을 본 적이 없어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지 알 수가 없지만, 굳게 닫혀있던 칠궁의 문이 활짝 열려 많은 사람들이 칠궁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청와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의 주산인 백악산의 맥을 끊기 위하여, 경북궁의 주산인 백악산 밑에 총독부 관저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해방이 되어 경무대란 이름으로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과 거처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몇 번의 개보수와 증축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정부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청와대를 두고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였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불명예스럽게 탄핵으로 물러나 재판을 받는 치욕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새 대통령엔 이재명후보가 당선됐다. 선거과정에서 차기 대통령은 다시 청와대로 복귀할 것이란 소문이 돌아 마지막으로 청와대를 관람하고자 인파가 넘쳐났다.
청와대 옆 인왕산 길,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청와대 담장 안에 있는 기와집 몇 채, 청와대의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이 몇 채의 기와집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낡은 기와집은 청와대의 일부가 아닌 바로 육상궁으로 지금은 칠궁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은 청와대와 완전 분리하였지만, 칠궁은 무엇이며 왜 청와대 안에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칠궁은 본래 모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동이>라는 사극에 나오는 인물인, 조선시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숙빈묘를 세웠다. 구중궁궐에 최하위 계층인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눈에 들어, 성은을 받은 덕에 영조를 잉태하게 되었지만, 장희빈의 투기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최무수리’ 즉 최숙빈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1753년 영조 29년에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하였으며 그 후 영친왕의 어머니 순빈 엄씨를 포함한 일곱 분을 모셨기 때문에 칠궁이라고 하였다.
칠궁에는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원종(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의 생부)의 어머니 인빈 김씨, 조선왕조 후궁 중에 대표적인 인물인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장희빈), 영조의 어머니인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진종(영조의 장자인 효창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조선조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어머니 순빈 엄씨 등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선왕조의 임금과 왕비는 죽어서 종묘에 위패가 모셔지지만, 왕의 생모이지만 후궁이기 때문에 죽어서 종묘에 봉안되지 못하고 별도로 위패를 봉안하는 곳을 마련하였는데 그곳이 칠궁이다.
서두에 말했듯이 지금의 청와대 터는 옛날 경복궁의 일부였으나 일본이 조선총독부 관사를 지어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문재인 정부까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본래 칠궁의 터는 귀방(鬼方)즉, 귀신의 방위라고 한다. 칠궁은 사람이 사는 터가 아니고 귀신이나 신명이 활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숨어서 활동하는 이귀방(裏鬼方)이기 때문에 한 많은 여인을 모시는 사당을 그 자리에 세웠던 것으로 대통령 집무실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때는 일 년에 한 번씩 칠궁에 제를 지내, 일곱 영령을 위로하여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부터 누구 한 사람 칠궁에서 제를 지낸 적이 없으며, 또 제를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는 처지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반영을 위해서 칠궁에다 제를 올렸으면 한다. 그렇게 하여 칠궁에 계신 일곱 영령과 그곳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을 달래주어야 한다.
살아서는 구중궁궐의 엄격한 법도와 많은 후궁과 정비의 시샘과 음모 속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어 보지도 못하고 살다가, 도리어 왕자를 낳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모자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감수하여야 했던 그 수모와 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자식이 나라의 임금이 되었지만, 본인은 죽었어도 후궁이라는 굴레 때문에 종묘에 모셔지지 못하고 경복궁 후미진 한편에 팽개쳐졌으니 그 한인들 오죽하겠는가?
제3공화국 시절 당시 청와대에 근무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어색하게 담 밖으로 사당의 기와지붕이 나와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왕산으로 새 길을 내면서 칠궁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도로 계획을 세웠지만, 자기의 별장이 도로에 포함된 어느 재벌과 당시의 서울시 책임자의 장난으로 칠궁의 담을 헐어내고 인왕산 길을 내어 지금 흉측한 모습이 되었으며, 그 해 8월15일 문세광 저격 사건이 일어나 온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으며 국모로서의 모범을 보여 준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칠궁의 정문을 경호 책임자가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방향으로 대문을 다시 세우고 난 뒤 다시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니 우연이라고 가볍게 넘겨 버리기에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오뉴월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칠궁의 일곱 여자는 살아서도 한 많은 삶을 살았건만 죽어서까지 경복궁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자손들로부터 제삿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받는 한 많은 세월을 원망하며 독을 품고 있는데, 집주인인 일곱 영령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주인집 담장을 헐어 길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 대문까지 마음대로 바꾸어 놓았으니, 그래도 후손이라고 참았던 한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가 바로 대통령의 서거가 아닌가 한다.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공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렸을 때 간혹 칠궁으로 들어가곤 하였지만 들어갈 때마다 항상 찬바람이 불고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어른들이 그곳에는 출입 못 하게 항상 만류하였다고 한다.
필자의 제안대로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이씨 종약원에서 칠궁제를 모셨다고 들었다. 종묘도 일 년에 한 번씩 종묘제례를 지내니, 칠궁에 계신 분들의 존재도 세상에 알리고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합당한 대우를 해 드려야 한다. 21세기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필자는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의 분노에 찬 모습이 자꾸만 느껴져 두렵기만 하다.
이제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많이 사라졌으니 일곱 여인의 한을 위로 해주는 칠궁제가 펼쳐질 시간이 되었다. 대통령이 머무는 곳도 아니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니 칠궁 해원제가 반드시 국민적 화합 속에서 펼쳐졌으면 한다.
칠궁은 아래와 같다.
육상궁(毓祥宮) :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저경궁(儲慶宮) :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仁祖의 아버지)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
대빈궁(大嬪宮) :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영조의 이복형)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
연우궁(延祐宮) :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
선희궁(宣禧宮) :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映嬪李氏)
경우궁(景祐宮) :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
덕안궁(德安宮) :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
조성제(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박사)